[WIKI 추적] 전직 중국군 장교, 30년의 침묵을 깨고 천안문 학살을 증언하다
[WIKI 추적] 전직 중국군 장교, 30년의 침묵을 깨고 천안문 학살을 증언하다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9.06.04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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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베이징에서 시위대가 '자유의 여신상'을 둘러싸고 민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ATI]
1989년 베이징에서 시위대가 '자유의 여신상'을 둘러싸고 민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ATI]

전직 중국군 장교가 30년의 침묵을 깨고, 1989년 당시 군부 내에서 천안문(톈안먼) 학살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고, 증언했다.

1989년 중국의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부르짖으며 벌어졌던 시위사태는 세계의 이목을 중국의 정치 지형에 집중시킨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중국 정부는 학생들의 주도로 벌어졌던 민주화 시위와 단식투쟁을 계엄령과 탱크를 동원에 진압했으며, 전 세계는 이 광경을 두려움에 떨며 지켜보았다.

그때 현장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정부의 강경 조치는 평생 잊히지 않는 상처를 남겨놓았다.

1989년 6월 4일, 중국 군대가 정치적인 반대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베이징으로 밀려들 때 난무하는 총탄 속에서 사람들이 쓰러지고, 도로는 무고한 시민들의 피로 뒤덮였었다.

오늘날에도 중국은 검열이 일상화되어 있으며, 사이버 공간에서조차 탄압이 공공연히 자행되는 등 반대자들에 대한 보복이 만연하고 있어서 정치적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은 그저 숨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경제적 만족이나 개인의 복리를 추구하면서 조용히 사는 것이 최상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해있는 것도 사실이다.

지앙 린(Jiang Lin)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다고 여긴다.

당시 인민해방군 중위였으며 군 신문사 기자였던 지앙 린은 학살 현장의 선두에 서서 사태의 흐름을 면밀히 지켜볼 수 있었다.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군 장교로 활동했던 지앙 린. [사진=ATI]
천안문 사태 당시 중국군 장교로 활동했던 지앙 린. [사진=ATI]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지앙 린은 중국의 젊은이들이 중국 정치 지형의 변화를 추구하며 저항운동을 벌였고, 군부 내에서도 그녀와 많은 동료 장교들은 폭력적인 진압에 반대했지만 결과적으로 유연한 대처를 바라는 목소리는 힘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올해 66살이 되는 지앙 린은 자신이 목도한 상황을 처음으로 세계에 알리고자 한다. 더불어, 그녀는 가슴속에만 담아놓고 살았던 지난날의 회한에 대해서도 털어놓으려 한다.

“30년간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지앙 린은 이렇게 토로했다.

“저항 운동에 참여했던 사람이라면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대로 밝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의무일 뿐만 아니라 생존자들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서도 절박한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지앙 린은 이처럼 자신이 당시 상황을 폭로하기로 결심한 데에는, 중국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정신적 상처를 안겨준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이 여전히 반성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중국 공산당은 천안문 사태에 대한 공개적 토론을 금지하고, 이와 관련한 많은 책, 영화 등의 매체에 대한 검열을 지속하고 있다. 지금까지 중국 정부는 사태 당시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에게 사죄를 표명한 적이 없으며, 공식적으로 사망자 숫자를 집계해서 발표한 적도 없다. 학살 사태를 추모하는 사람들은 그저 숨을 죽이고 애도할 뿐이다.

권위주의 정부이기는 했어도 양심적인 목소리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목소리는 밖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사태는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지앙 린은 죄 없는 학생들에게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총탄 세례를 목격하기에 이르렀다. 군인들은 그렇게 하라는 명령 하나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던 것이다.

이전에 실시된 조사에서도 군대를 동원한 진압에 반대했던 고위 지휘관들 사이에 저항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지만 지앙 린의 증언을 통해 이러한 정황이 더욱 자세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그녀는 당시 ‘제38 집단군(38th Group Army)’을 이끌던 쉬 친셴(Xu Qinxian) 장군이 천안문 사태에 군이 개입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쉬 친셴(Xu Qinxian) 장군이 사태에 개입하기 싫어 병을 핑계로 병원에 입원해있는 사이 7명의 지휘관들이 계엄령에 반대하는 연판장에 서명을 했다.

“그들의 주장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지앙 린은 이 연판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천안문 시위 당시 진압 장면.
천안문 시위 당시 진압 장면.

 

“인민해방군은 인민의 군대이므로 도심으로 진격하거나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눠서는 안 된다.”

지앙 린은 중국 공산당 중앙기관지 <인민일보>의 편집장에게 전화로 연판장의 내용을 읽어주었다. 당시 <인민일보>의 간부들은 시위 사태에 대한 사전 검열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보도되지 않았다. 서명 지휘관 7명 중 한 명이 자신의 이름이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6월 3일 군대가 베이징으로 진격해 들어왔고, 비무장 시민들에 대한 학살이 시작되었다. 군대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6월 4일까지 광장을 비우라는 명령을 하달 받았으며, 시민들은 집 밖으로 나오지 말 것을 강요받고 있었다.

하지만 지앙 린은 저항했다.

지앙 린은 사태의 전개 상황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잠입했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참혹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시위대로 오인 받아 죽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과감하게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그녀는 군인이라는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기를 원치 않았다.

“저는 저의 책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앙 린은 이렇게 말했다.

군에 소속된 기자로서 “저의 임무는 현장의 상황을 신속히 보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그녀는 쏟아지는 총탄과 폭발, 불타는 차량의 화염 속을 아슬아슬 뚫고 다녔다. 그녀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가능한 현장에 밀착하고자 했다. 무장한 경찰관들이 그녀에게 전기봉을 휘둘렀다. 그녀의 머리가 터져서 흐르는 피가 도로를 적셨다.

지앙 린은 군대의 보복이 두려워 군 시절의 신분을 아무에게도 발설한 적이 없다.

“나는 이제는 인민해방군이 아니다.”

그녀는 이 소리를 입에 달고 산다.

“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그녀는 당시에 입었던 머리의 상처 때문에 큰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녀는 그 사태 이후 몇 달간 심문을 받아야했다.

천안문 사태는 그녀가 겪은 최악의 경험이었다. 그녀는 인민들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권위주의 정부의 실체를 직접 목격한 것이다.

“어머니가 강간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지앙 린은 현재 천안문 사태 당시 벌어졌던 학살을 부인하는 정부에 대항하는 시민단체에 가입되어있다. 최근에는 1989년 사태에 참여했던 사진작가가 사진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물론, 미국으로 이민가고 나서의 일이기는 하지만.

하지만 지앙 린이 목소리를 높이는 일은 버겁기만하다. 그녀는 전직 군 장교 출신에다가 중국군 엘리트 장군 집안의 딸로서 그녀의 성장 과정은 중국군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따라서 그녀의 과감한 저항 운동은 의심할 나위 없이 국가에 대한 배반 행위로 비칠 것이다. 나아가, 일부는 그녀를 반역자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위대가 부상당한 젊은이를 운반하고 있다.
시위대가 부상당한 젊은이를 운반하고 있다.

그러나 지앙 린은 인민해방군 경력에 긍지를 지니고 있으며, 군 기자 시절에 대해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10대 때 찍은 사진을 보면 그녀는 푸른 군복을 입고, 올바른 역사의 선택을 했다는 듯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다. 그녀는 인민의 군대가 비무장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을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평범한 인민에게 군대가 탱크와 자동소총을 난사하는, 그러한 운명의 급전직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지앙 린은 이렇게 되물었다.

“그것은 정말 미친 짓이었습니다.”

지앙 린은 1996년 군을 떠나서 조용한 삶을 살고 있다. 그녀는 그동안 국가를 대신해서 사죄를 하는 정치 지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려왔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결과야 어찌되건 간에 목소리를 높이기로 작정했다.

“사상누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면 그보다 더한 거짓말도 가능할 겁니다.”

[위키리크스한국=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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